비운의 '풍운아' 이천수, 이제는 내셔널리그 조차도 원하지 않아
한반도와 일본 열도가 얼마 앞으로 다가온 자국의 월드컵으로 한창 들떠있던 2000년, 혜성처럼등장하여 전 국민적인 관심을 한몸에 받는 축구스타가 탄생했다. 그는 바로 2000년 1월 일본에서 열린 신년맞이 19세이하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한국을 우승으로 견인하며 스타덤에 오른 '풍운아' 이천수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스타의 등장
부평고 재학시절부터 부평고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천수는 청소년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신년맞이 19세이하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상대로 골을 뽑아내며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국가대표로도 발탁된 그는 박지성과 함께, 이동국에 이어 한국축구를 이끌어나갈 재목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후 히딩크의 부름을 받고 나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끄는데 일조하며 5천만 국민과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입증해냈다. 자신의 재능을 인정한 수 많은 구단 가운데서도 이천수는 스페인의 레알소시에다드를 선택하였고 '밀레니엄 특급'이라 불리던 그의 축구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릴것만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꼬일대로 꼬여버린 축구인생
당시만해도 많지 않았던 축구스타의 해외진출로, 이천수는 박지성, 이영표, 송종국 등 2002 한일 월드컵 주역들과 함께 국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부름 받은 구단으로 떠났다. 하지만 박지성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과 달리 세계 3대 축구리그 중의 하나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로 직행한 이천수의 스페인 적응은 쉽사리 이루어 지지 않았고 누만시아로의 임대 생활을 거친 끝에 결국 이천수는 자신의 친정팀인 울산 현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예전의 기량을 빠르게 되찾은 이천수는 소속팀 울산 현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해외무대로의 진출을 시도한다. 바로 2002 한일 월드컵 직후 송종국이 몸담았던 페예노르트로의 이적이다.
페예노르트 이적, 이천수의 축구인생을 바꾸어 놓다.
2007년 이루어진 페예노르트로의 이적이 이천수에게 이렇게 큰 시련을 가져다 주리라고는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잠시의 슬럼프를 겪은 이천수가 K-리그에서의 재정비를 마치고 해외진출을 노릴 수 있는 몸상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국민들의 관심속에 네덜란드 페예노르트로 이적한 이천수는 향수병을 호소하며 다시 한번 '적응실패'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페예노르트에서 적응실패 후 이천수는 수원으로 임대되어 k-리그 재기를 노렸으나 불성실한 그의 훈련태도로 인해 이마저도 여의치않게 되었다. 제2의 아버지로 여기던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수원에서마저 임의탈퇴 처리된 이천수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이로써 '무적'상태가 된 이천수에게 2002년 호흡을 맞췄던 박항서감독에게서 콜이 왔다. 같이 전남에서 뛰어보자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이천수는 전남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이로써 페예노르트와 수원, 수원과 전남의 임대, 재임대 협상이 이루어졌고 페예노르트-수원-전남 3자 간 줄다리기 끝에 전남이 수원에 6개월 치 재임대료 2억8000만원, 페예노르트에 잔여 6개월에 대한 임대료 5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전남에서의 선수생활
전남에서의 장밋빛의 선수생활을 꿈꾸었던 이천수였겠지만 그의 전남생활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책임질 것을 다짐하며 이천수를 데려온 박항서 전남 감독 역시 이천수로 인해 전남에서 평탄한 축구생활을 하지는 못했다. 이천수에 대한 완전이적협상권이 전남에서 페예노르트로 넘어갔을 무렵 중동의 한 클럽에서 이천수에 대한 이적제의가 들어왔다. 페예노르트는 이에 대해 '2007년 페예노르트 입단 당시 연봉 이상을 지불하는 팀이 나오면 페예노르트가 자유롭게 이적시킬 수 있다’는 새로운 옵션을 공개하며 이천수의 중동 행을 타진하고자 하였다. 구단 관계자 조차도 전혀 알지 못했던 조항을 듣게된 전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고 이천수는 “만일 페예노르트가 이적을 추진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떠날 수밖에 없다”며 이면계약과 관련해서는 묵인했다. 이후 방황의 나날을 보내던 이천수는 코치폭행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긴채 전남의 임의탈퇴 공시와 함께 결국 사우디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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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주름잡던 풍운아, 그가 돌아갈 곳은 어디???
이후 사우디의 알나스르, 일본의 오미야 아르디자 등으로 거처를 옮겨다니며 철새 같은 선수생활을 계속 하던 이천수가 이제 다시 한국무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화려했던 경력만큼이나 수많은 염문, 구설수를 뿌리고 다녔던 이천수는 참회의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생활을 반성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그러한 그가 한국무대에서의 재기를 위해 처음으로 두드린 문은 바로 내셔널리그이다. 세계축구의 흐름 속의 한사람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가 진출하기에는 다소 작은 무대이지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현재 그에게 허락되기에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천수는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고려대 시절 스승인 울산 현대미포조선 조민국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현대미포조선은 고민 끝에 "대한축구협회에 문의한 뒤 무리가 없다면 도와주겠다"며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가능해졌다. 이천수가 전남을 떠날 당시 전남은 이천수를 임의탈퇴 신분으로 공시하였고 대한축구협회는 '임의탈퇴신분의 선수는 축구협회 산하에 있는 모든 리그에서 뛸 수 없다'는 규정을 근거로 이천수의 국내무대복귀를 막아섰다. 현재 오미야를 떠난 뒤 8개월째 '무적(無籍)'상태인 이천수는 자신의 거취를 고민하고있는 상태이다.
이천수만의 문제일까??
코치폭행, 주먹감자, 수많은 스타들과의 염문설 등과 같이 100퍼센트 이천수의 언행문제라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천수의 도덕성을 크게 실추시켰던 이면계약사건에 관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다. 이천수만의 도덕성 결여 뿐만 아니라 전남측의 처우에 대한 문제점역시 산재하였으나 비교적 약자인 이천수가 언론의 권력앞에 굴복해야했다는 시선 또한 적지않다는 것이다. 민감한 사안이기에 필자 역시도 다루기가 만만치 않은 주제였고 그에 따라 더욱 많은 시간을 자료조사에 할애 해야했다. 물론 이 사안에 대한 진실을 완벽히 가려내는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2000년대 등장한 이후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였고 한일월드컵, 독일월드컵에서 연이어 자신의 진가를 국민앞에 증명해 보이며 자만에 빠지지 않는 것 역시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천수와 관련한 모든 사건을 비단 이천수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다는 의견들 또한 상당부분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보았고, 그에따른 자신의 자만심을 컨트롤하기에는 그가 살아온 인생이 너무나 짧았을 것이다. 최태욱을 따라잡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트래핑 연습을 했다는 이천수의 일화는 아직도 여러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있다. 이러한 노력파 이천수가 왜 자만에 빠지고 열정을 잃어 버릴 수 밖에 없었는지, 그가 방황하는 동안 그를 채찍질하고 본래의 정도(正道)로 데려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는지, 한국 축구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이천수에 대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크게 남는바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순스포츠, 스포탈코리아, 스포츠동아, 스포츠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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